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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기업경제실천운동본부

국민기업경제를 실시하면 근로소득세 없는 나라, 사업소득세 없는 나라, 법인세 없는 나라, 연평균 10% 이상 경제가 성장하는 나라, 국민기업이 국민기업 이익금으로 0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모든 국민이 중산층 이상 생활을 할 수 있는 돈(한국의 경우 매달 100만원 이상)을 평생 지급하는 나라가 됩니다. 모든 국민이 잘사는 나라, 돈(생활비ㆍ교육비)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없는 나라, 가난이 대물림되지 않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 가장 밑바닥의 슬픔, 고통, 좌절을 이겨낸 김종서 박사 이야기 2 ; 고아를 부러워한 어린 시절 


   김종서 박사가 왜 ‘국민기업경제(국민공동소유기업경제ㆍ국민공동소유토지경제)’라는 경제이론을 창조하게 되었는지,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각종 국가 제도를 개혁하는 방안을 연구하게 되었는지, 은퇴하여 편히 여생을 보내야 할 나이에 왜 국민기업경제 실시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정치를 시작하려고 하는지, 김종서 박사가 대통령이 된다면 김종서 박사가 대한민국을 지배해온 대한민국 상위 1% 계층(기득권층)에 맞서 대한민국을 무주택자 없는 세상, 세금 없는 세상, 국채 발행 없는 세상, 생활비ㆍ교육비 걱정 없는 세상, 노후 걱정 없는 세상, 연금 없이도 더 잘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능력과 열정을 가진 사람인지 확인해 보시려면 김종서 박사가 어떠한 삶을 살아온 사람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김종서 박사가 살아온 이야기, 슬프고 아픈 이야기, 인간 세상 가장 밑바닥에서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승리한 김종서 박사의 이야기를 읽어보십시오.

   다음의 글들은 김종서 박사의 연구서인 《기본소득과 국민기업경제》 후미에 “집필을 마치며”라는 제목으로  김종서 박사 스스로 쓴 자전적 이야기를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여기서 ‘필자’는 ‘김종서 박사가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2. 고아를 부러워한 어린 시절 

 

   필자의 선친은 밤이 되면 늘 석유 등잔불 불빛에 책을 비추어 가시며 소리 내어 읽으셨다. 읽으시는 것은 주로 삼국지, 초한지, 춘향전, 심청전, 옥단춘전, 장백전, 유충렬전, 어룡전, 옥루몽, 구운몽 등의 고전이었다. 때문에 필자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오자마자부터, 아니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선친의 고전 읽으시는 소리에 잠이 들고 잠이 깼다.


   필자는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3학년 때에 선친께서 읽으시던 고전 수십 권을 읽었다. 고전의 한글 고문과 한자를 독학으로 깨우치면서 전부 읽었다. 더 이상 읽을 것이 없자 책을 가진 동네 형, 누나, 아저씨, 아줌마들의 일을 도와주고 연애소설, 문학집 등을 닥치는 대로 빌려서 읽었다. 밥상을 갖다 놓고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는 중에도 정신없이 책을 읽는 경우가 많았고, 읽을 책이 있으면 밤을 지새웠다. 그 대가는 꾸지람으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집에서 더 이상 읽을 것이 없자, 학교 문고의 책들과 학급 문고의 책들을 교실에 홀로 남아서 읽느라 땅거미가 질 때가 되어서야 귀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늦게 귀가하면 꾸중을 들을 것이 뻔했지만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는 재미에 푹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글씨가 잘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학교에 남아 있곤 했다.


   선친께서는 마을 친구분들이 놀러 오시면 필자를 불러서 삼국지 등의 고전에 있는 내용들을 아저씨들께 이야기해드리라고 시키시곤 하셨다.


   필자는 초등학교 6년을 다니는 동안 감히 『수련장』이나 『전과』 같은 참고서를 사서 볼 생각도 못했고, 숙제를 제대로 해 간 적도 거의 없었다. 소 풀 뜯기랴, 소 꼴베랴, 새 보랴, 선친 따라 약초 캐러 다니랴, 아이들 하고 놀랴, 책 읽으랴, 숙제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시험을 보면 늘 거의 다 맞았고, 시험 성적은 늘 10% 안에 들었다. (그러나 우등상은 한 번도 받지 못했고, 성적표에는

우수수가 아니라 미가 두세 개 있고 양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방학을 앞두고 성적표를 받는 날이면 홀로 눈물을 삼켰을 뿐 따질 용기가 없었다, 우등상은 늘 잘사는 집 아이들 몫이었다.)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1등으로 합격하면 3년 동안 등록금, 수험료를 면제받는다는 말을 들었다. 선친에게 1등으로 합격할 자신 있으니 진학 공부를 시켜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진학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학교에) 시험지대를 매달 150원(당시 하루 품삯이 약 80원, 계란 10개가 약 80원, 돼지 고기 한 근이 약 80원이었다.)씩 추가로 내야 했다(비진학생은 매달 50원씩, 진학생은 매달 200원씩 시험지대를 냈다). 그러나 시골에서 서로 품앗이로 농사를 지을 뿐, 품삯을 주고 일을 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때문에 진학 공부를 할 수 없었다.


   선친은 농사일이 바쁘지 않을 때는 가엽산 깊은 산중으로 시호, 창출 등의 약초를 캐러 가시곤 했다. 필자도 휴일이 되면 선친을 따라가서 약초를 캐곤 했다.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 초등학교 6학년의 어느날, 아버지를 따라서 가엽산으로 가서 하루 종일 약초를 캐고 집으로 돌아오니 작은 누님이 와 계셨다.


   작은 누님은 필자에게 어차피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하니 장사를 배우라는 것이었다. 충주 시내에서 그릇 가게를 크게 하는 이가 장날이면 장터에 와서 그릇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누님이 그에게 ‘내 동생이 참 똑똑한데 돈이 없어 중학교를 가지 못한다’고 말을 하자, 자기 가게에서 3 ~ 4년 동안 (밥만 먹고 잠만 자며 무급으로 일하는) 점원으로 일하면 장사를 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었다. 선친은 필자가 힘든 농사일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말에 별다른 반대를 안 하셨다.


   초등학교 6학년을 마치기도 전에 먹는 입도 하나 덜 겸 장사도 배울 겸 그릇 가게의 점원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1년도 가기 전에 그릇 가게 주인은 부도를 내고, 필자에게 집으로 돌아갈 차비도 남겨 두지 않은 채 야반도주를 하였다.


   집으로 돌아와서 이발소에서 머리 감기는 일도 몇 개월 해보고, 농사일도 하면서 지내던 중에 선친께서 원주로 이사 간 조카 집을 다녀오셔서 ‘네 4촌 형네 이웃에 고아원이 있는데, 나라에서 고아들을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 주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공부도 시켜 준다는구나’라고 하셨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공부를 고아들은 마음껏 할 수 있다니, 고아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눈물이 쏟아졌다. 아버지가 계시니 고아원에 갈 수도 없는 내 처지가 참으로 비참했다. 말씀이나 하시지 말지 …… .


 더 자세히 아시려면 김종서 박사의 『기본소득과 국민기업경제』『국민이 주인인 나라』『라스트혁명』 을 읽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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