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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기업경제실천운동본부

국민기업경제를 실시하면 근로소득세 없는 나라, 사업소득세 없는 나라, 법인세 없는 나라, 연평균 10% 이상 경제가 성장하는 나라, 국민기업이 국민기업 이익금으로 0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모든 국민이 중산층 이상 생활을 할 수 있는 돈(한국의 경우 매달 100만원 이상)을 평생 지급하는 나라가 됩니다. 모든 국민이 잘사는 나라, 돈(생활비ㆍ교육비)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없는 나라, 가난이 대물림되지 않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 가장 밑바닥의 슬픔, 고통, 좌절을 이겨낸 김종서 박사 이야기 1 ; 충주 의병 전쟁에 참여한 필자 집안의 몰락


   김종서 박사가 왜 ‘국민기업경제(국민공동소유기업경제ㆍ국민공동소유토지경제)’라는 경제이론을 창조하게 되었는지,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각종 국가 제도를 개혁하는 방안을 연구하게 되었는지, 은퇴하여 편히 여생을 보내야 할 나이에 왜 국민기업경제 실시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정치를 시작하려고 하는지, 김종서 박사가 대통령이 된다면 김종서 박사가 대한민국을 지배해온 대한민국 상위 1% 계층(기득권층)에 맞서 대한민국을 무주택자 없는 세상, 세금 없는 세상, 국채 발행 없는 세상, 생활비ㆍ교육비 걱정 없는 세상, 노후 걱정 없는 세상, 연금 없이도 더 잘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능력과 열정을 가진 사람인지 확인해 보시려면 김종서 박사가 어떠한 삶을 살아온 사람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김종서 박사가 살아온 이야기, 슬프고 아픈 이야기, 인간 세상 가장 밑바닥에서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승리한 김종서 박사의 이야기를 읽어보십시오.

다음의 글들은 김종서 박사의 연구서인 《기본소득과 국민기업경제》 후미에 “집필을 마치며”라는 제목으로  김종서 박사 스스로 쓴 자전적 이야기를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여기서 ‘필자’는 ‘김종서 박사가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1. 충주 의병 전쟁에 참여한 필자 집안의 몰락 

 

   필자가 만 17세가 되기 전인 1972년에 8월 19일에 제천ㆍ충주 지역에 대홍수가 있었다. 현재 충주 댐으로 수몰된 지역 대부분이 물속에 잠겼다. 그해 가을, 필자는 선친을 따라 살미면 목벌리에 사시는 고종사촌 형님(문용식, 큰 고모님의 장남)댁을 방문했다. 사촌 형님댁에서 치르는 형님의 큰딸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충주 시내에서 남산 마즈막재를 넘어 남한강 강가에 있는 목벌리까지 20리도 넘는 길을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걸어서 갔다.


   목벌리에서 하룻밤을 자고 살미면 용천리에 있는 재당숙 댁에 들려서 수안보 온천으로 향했다. 70여리(28km)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간 것이다. 선친께선 풍(風)으로 인한 서 가려움증으로 고생하셨기 때문에 매년 한두 차례씩 목벌리와 살미의 친척집에 다녀오시는 길에 수안보 온천까지 다녀오시곤 하셨다. 목벌리에서 걸어서 한수면을 지나 살미면으로 향했다. 남한강 강가를 따라 걷는데, 강 양쪽으로 솟아있는 산의 꽤 높은 지역까지 대홍수 때 잠겼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계속 걸어서 홍수로 잠겼던 한수면 피해 현장을 돌아보았다. 여러 마을들과 논밭들이 모두 홍수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에 가게 점원으로 일했던 한수면 황강리를 비롯한 마을들이 모두 폐허가 된 것이었다.


   한수면 신당리를 지나 살미면 삼거리(현 용천삼거리)께에 이르렀을 때 (1906년생 이신) 선친께서 멀리 보이는 마을에 있는 큰 기와집을 가리키시면서 ‘저 집이 옛날 우리집이었다. 내가 어릴 때까지도 살미면, 상모면, 장연면에 많은 땅을 가진 큰 부자였다. 저 기와집에서 내가 태어났다. 집이 부자였기 때문에 할아버지(선친의 조부)께서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마을 사람들을 모아서 의병들이 입을 옷을 짓게 하시고, 의병들이 신는 짚신을 만들게 하셨고, 의병부대에 식량과 군자금을 대주셨단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땅도 우리 땅이 아니고 그 집도 우리 집이 아니다’라고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선친으로부터 어려서부터 셀 수 없이 많이 들었던 그 말씀을 아버지의 고향, 아버지의 옛집을 멀리 바라보면서 다시 들으니 필자도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때문에 선친께 ‘아버지 제가 돈 많이 벌어서 땅과 집을 다 찾아드릴게요. 우시지 마세요.’하고 약속하였다. 눈물을 흘리며 한 그 약속을 꼭 지키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살았다. 그러나 선친과의 그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했다. 내겐 조상의 집과 땅을 되찾는 것보다 사대사관, 식민사관에서 광복되지 못한 한국사의 진실을 밝히는 연구가 더 중요하였기 때문이었다.


   선친께서는 또 ‘선친(필자의 할아버지)께서 의병들이 일본군 수안보 병참기지를 공격하는 전투에 참전하셨다고 하셨다. 선친이 할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은 말씀은 ’의병이 산에서 수안보에 있던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격할 때,의병들은 총 한 발 쏘려면 화승총에 화약과 탄환을 넣고 심지에 불을 붙여서 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렸고, 일본군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쉴새 없이 연속으로 총을 쏘아대기 때문에 의병들은 일본군의 싸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의병들은 일본군 총에 맞아 퍽퍽 쓰러졌고, 의병들은 일본군 병참기지를 점령해보지도 못하고 패주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선친께서는 또 ‘우리집이 일본군에 의해서 불태워질 뻔했었단다.’고 하셨다. ‘일본군이 수안보에 병참기지를 두었기 때문에 마을을 지나는 길(부산 → 문경 새재 → 수안보 → 충주 → 서울을 이은 도로, 현 3번 국도)을 지나다니던 일본 군인들이 한번은 우리 옛집 대문을 열고 들어와서 물을 청하였는데, 필자의 증조부께서 보시곤 왜놈들이 감히 아녀자들이 있는 집안으로 들어온다고 화를 내시면서 담뱃대로 일본군을 때리려고 하셨고, 이에 일본군이 화를 내며 집을 불살라버리겠다고 하였는데, 일본군 통역을 하던 조선 사람이 노인이 망령이 들어서 그러니 용서해주자고 사정하여 무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이러한 저항 정신은 필자의 집안이 몰락하는 원인이 되었다. 일본이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은 후 실시된 일본(일제)의 토지 조사 때에 ‘조상이 물려준 내 땅을 왜 왜놈들에게 신고하느냐는 반일 의식, 적국에 협력할 수 없다는 반일감정’ 등으로 토지 조사 신고를 하지 않았고, 그 결과 집과 땅을 잃고 몰락하고 만 것이다.


   반면 ‘살미면 면사무소 서기로 다니던 ○○○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비가 오면 자기 집 지붕이 새서 방안 여기저기 그릇을 놓고 물을 받을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비가 오거나 먹을 것이 마땅찮을 때는 우리 집 사랑채에서 자고 우리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면사무소에 다녔다. 그 ○○○이 면사무소 다니면서 일본강점기에 토지 조사를 하지 않은 땅들을 찾아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큰 부자가 되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필자가 살미면 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조선 말기, 대한제국 시기, 일본 강점기의 살미면 소재 토지ㆍ주택 소유 관계 등의 기록을 확인해 보고자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6. 25 때 살미면 면사무소가 불타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서 확인해 줄 수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때문에 조상님들이 사시던 집 주소도 확인할 수 없었다. 선친과 함께 살미에 갔을 때 직접 그 동리, 그 집을 확인해보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필자가 호적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집안이 몰락한 후의 주거지 주소 뿐이었다. 때문에 시간이 되면 직접 살미를 방문하여 조사해보고자 하였지만 마음 뿐이었다. 필자에겐 집안의 역사를 밝히는 것보다 국가, 민족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필자가 10여세 때부터 선친으로부터 셀 수 없이 많이 들은 필자의 집안 이야기, 18세 때 선친의 고향, 우리 집안의 본향에서 선친으로부터 들었던 필자의 집안 이야기를 생각할 때마다 목이 메이고 눈물과 콧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흐른다.


   필자의 집안이 몰락한 이후 할아버지는 이웃 마을 외진 곳의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셨다가 청풍김씨 처가(필자의 진외가)가 있는 괴산군 불정면 창산리로 이주하셨다. 그러나 이주한 지 오래되지 않아 딸과 사위의 살림살이를 도와주시기로 하였던 선친의 외할아버지(필자의 진외증조부)께서 곧 돌아가셨다고 한다. 선친의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재산을 양자에게 전부 넘겨주시고 외동딸과 사위인 할아버지에게는 남에게 돈과 곡식을 빌려주고 받지 못한 장부만 넘겨주셨다고 한다. 그러나 장부에 있는 채무자 중에 누구도 그 빚을 갚겠다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모든 사람들이 필자의 진외증조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다 갚았다고 하였기 때문에 한 푼도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후에 선친은 일본 탄광으로 징용을 가셨다. 돈을 벌러 가신 것이었지만 먹을 것이 부족하고 일은 너무 힘들어서 그 고생이 말이 아니셨다고 한다. 그러나 징용 초기에 가셨기 때문에 몇 년 고생 끝에 모은 돈을 가지고 귀국하셨다.


   선친께서는 징용으로 번 돈으로 충주 대소원 장터에 집을 사고, 땅을 사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농사를 지으셨다. 그러던 중 일본의 징용 통보가 선친께 다시 나왔고, 선친은 집과 땅을 동생에게 맡기면서 부모님을 잘 모시고 있으라고 부탁하고 징용을 피하여 수십 리 밖에 있는 마을로 이주하셨다.


   선친께선 그 마을로 도피 후에 밀기울, 감자, 고구마, 멀건 나물죽, 멀건 조당수, 꽁보리밥으로 끼니를 때우시면서 무덥고 추운 계절을 가리지 않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힘든 농사일을 하셨다. 그러나 ‘힘들다’는 말씀을 한 번도 안 하셨다. 그러한 선친께서 ‘징용 가서 힘겨운 광산 노동에 먹을 것마저 부족하여 고통이 크셨다.’는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던 점, 징용을 피하여 부모와 재산을 버리고 달아나신 점 등을 미루어 보아 징용 당시 고통이 매우 크셨던 것 같다.


   그러나 당시는 필자가 어리고 징용문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다. 때문에 어디에서 어떻게 고생하셨는지 신경 써서 듣지도 않았고. 기록으로 남기지도 않았다. 자세히 듣고 기록으로 남겼더라면 일제 징용의 참혹함을 증거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를 한다.


   선친께서는 징용을 피하여 달아난 마을에서 집도 농토도 없이 큰 고생을 하셨다. 8.15 광복후 필자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장남을 찾아오셨지만, 선친은 동생에게 맡긴 집도 땅도 돌려받지 못하셨다. 차마 동생에게 집과 토지를 돌려 달라고 말씀을 못하신 것이다.


   1949년 6월 21일 대한민국 국회에서 농지개혁법이 제정되었다. 소작인(농민)이 분배받는 농지의 1년 수확량의 125퍼센트(%)를 5년에 걸쳐서 나눠 상환하는 것이었다. 농지개혁법이 제정되어 실시되던 1949년 당시는 물론 필자가 농사를 짓던 1960년 후반 ~ 1970년대까지도 소작인은 농지 소유주인 지주에게 매년 수확량의 50%를 소작료로 지급해야 했다. 따라서 농지개혁법에 의한 농지 분배는 공짜나 다름없었다.


   선친께서 토지 분배를 받으셨다면 필자도 정상적으로 중ㆍ고등ㆍ대학교로 진학하고 고시를 거쳐 고위 공무원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선친은 토지분배를 받지 않으셨다. 필자의 선친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을 하실 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농지개혁으로 자신의 토지를 갖게 된 자영농은 인력과 씨앗, 비료, 농약 등을 투입한 대가로 농업 수확물의 100%를 갖게 되었다. 반면 소작농은 인력과 씨앗, 비료, 농약 등을 투입한 대가로 농업 수확물의 50%를 갖고, 나머지 50%는 토지 소유주인 지주에게 바친다. 때문에 소작농을 가난한 농민의 대명사, 착취 당하는 자의 대명사처럼 생각해 왔다.


   선친은 농지개혁법 시행 이후에는 소작농도 할 수 없으셨다. 지주를 대리하여 소작농을 관리하는 마름 일을 하던 마을의 유력 인사가 강직한 성품을 가진 선친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소작할 농토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의 집은 가난한 소작농들보다 훨씬 더 가난한 집이 되었다. 소작할 농토가 없으니 쌀을 만들 벼를 수확할 수 없고, 유휴 인력이 넘치는 시대의 농촌 마을이니 품(노동력)을 팔 수 있는 기회도 없었다.


   그러나 선친과 형님은 마을에서 가장 근면하고 성실하고 정직하고 일을 잘하기로 이름난 분들이었다. 선친과 형님은 틈틈이 홍수로 돌무더기가 된 개울가 황무지를 논으로 만드시고, 20여리(8km)도 넘는 산속 골짜기에 논 다랑이를 만드시고, 화전을 일구셨다. 초등학교 다니던 필자도 한몫 거들었다. 그러나 더 이상 논 다랑이를 만들 곳도 없고, 화전을 일굴 장소도 없었다. 더우기 어머니께서 병환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그 병환을 고쳐보려고 진 빚으로 (12개월일 경우 연리 60% ~ 1개월일 경우 연리 720%의) 살인적인 장리쌀의 노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60년대에 서울에서 왔다는 사람이 징용ㆍ징병을 다녀온 사람들이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면서 징용ㆍ징병 사실을 조사하였다. 선친께서 징용을 갔던 일본 회사 이름, 주소, 징용 기간 등에 관한 자료를 주시고, 조사 비용도 주셨다. 그러한 일을 두 차례 보았다. 그러나 보상금은 나오지 않았다. ‘사기’였던 것이다.


 더 자세히 아시려면 김종서 박사의 『기본소득과 국민기업경제』『국민이 주인인 나라』『라스트혁명』 을 읽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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